제105기갑사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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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05기갑사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육군의 기갑 부대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서울을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 1947년 소련의 지원으로 창설되었으며, T-34 전차를 주력으로 운용했다. 한국 전쟁 초기에는 서울 점령의 주역으로 활약했으나, 미군의 참전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인해 전력이 약화되어 1950년 9월에 사실상 괴멸되었다. 이후 재편성되어 현재까지 존재하며, 김정일, 김정은 등 북한 지도자들의 현지 지도를 받으며 북한 국민들에게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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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기갑사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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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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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명칭 |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 사단 |
원어 명칭 | 근위 서울류경수 제105땅크사단 (한국어) |
기타 명칭 | 近衛ソウル柳京洙第105戦車師団 (일본어) 近卫汉城柳京洙第105坦克师团 (중국어 간체) |
종류 | 기갑 부대 |
역할 | 탱크전 |
역사 | |
창설일 | 1948년 ~ 현재 (추정) |
창설일 (구체적) | 1949년 5월 16일 |
소속 국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참전 전투 | 한국 전쟁 |
해산일 | (1952년 7월 해체) 이후 재창설 (추정) |
수훈 | 근위대 칭호 수여 |
규모 및 구조 | |
규모 | 사단 |
병과 | 기갑 |
역할 | 전략 예비 전력 |
지휘 | |
현재 소속 | 평양방어사령부 |
과거 소속 | 제820훈련소 |
주둔지 | 황해북도 곡산군 |
주요 지휘관 | 류경수 |
기타 | |
상징 (설명) | NATO 병과 기호 |
2. 역사
조선인민군의 기계화 부대 창설은 군 건군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평양에 주둔하던 소련군 제10기계화사단에서 전차병 양성을 위한 3개월 교육 과정이 개설되었다.[10] 이 과정을 수료한 인원을 기반으로 1947년 12월 제203독립교육전차연대가 편성되었고,[10] 1948년 5월에는 첫 교육생이 배출되어 제105전차여단 창설에 투입되었다. 제203교육연대는 보병사단의 자주포대대나 차량화연대의 운전병도 배출했다.[10]
한국 전쟁 당시 국경 회전에서 제107, 109연대와 차량화연대가 주공 방향인 철원-서울 축선에, 제203연대(1개 대대 결손)는 제1사단과 함께 조공 방향인 남하동-개성에 투입되었다.[11]
1950년 6월 25일, 20분간 포격을 가한 후 공격을 시작하여 같은 날 오후 늦게 제107연대가 의정부 지역에 진출했다.[13] 제109연대는 소흘리에 도착했지만, 도로 사정으로 포천 방면으로 진로를 변경해야 했고,[14] 다음 날인 26일 오후에 의정부 지역에 진출했다.[14] 한국군은 2.36인치(60mm) M9 바주카로 대항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제4사단과 제203연대 제3대대는 강력한 한국군의 저항을 극복하고 6월 27일 새벽에 의정부 지역에 진출했다.[14] 제1사단과 제203연대(1개 대대 결손)는 임진강 선까지 진출했지만, 한국군이 교량을 파괴하여 진격을 멈추고 교량을 건설해야 했다. 이 때문에 제203연대는 6월 28일에 서울에 진입하게 되었다.[14]
서울에는 안동수가 탑승한 312호 전차가 최초로 돌입했고,[9] 제107연대 제1대대장 김영 소령이 두 량으로 중앙청에 돌입하여 공화국기를 게양했다.[11][10]
서울 함락 후 '서울' 칭호를 받았고, 사단으로 승격했다. 오산 전투에서 미군과 조우하여 4량을 잃었지만 스미스 특임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이후 미국 공군의 참전과 대전 전투 이후 신규 투입된 슈퍼 바주카에 의해 점차 피해가 늘어갔다. 특히 항공기 공격이 위협적이었고, "비행기 사냥"이라는 맞바꾸기 전법이 지시되었지만, 효과는 없었고, 낙동강에 도착했을 때는 1개 전차연대 정도의 전력이 되었다.[10]
같은 해 9월, 유엔군의 반격 작전으로 결국 전량 괴멸되었으며, 당시 제105전차사단 정치군관(상위)이었던 오기완에 따르면, 류경수 사단장은 군복을 버리고 사복으로 철수하는 형국이었다고 한다.[13]
개전 직전 주둔지였던 영북면 운천리는 정전 후 한국 영토가 되었으며, 1954년부터 미군 제7사단 제1여단이 "캠프 카이저"로 관리했다. 닉슨 독트린 이후 1977년부터 한국 육군으로 이관되어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2018년부터 제8사단 예하)이 주둔하고 있다.[10]
그 후, 시기 불명이지만 재편성되었으며, 2001년 5월에는 김정일 총서기에 의해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탱크사단"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10] 김정은 총서기로부터도 현지 지도를 자주 받고 있으며, 북한 국민들로부터의 일반적인 인지도도 매우 높다.[10]
2. 1. 창설 및 초기 활동
1947년 5월 16일, 평양직할시 사동 호랑이골에서 조선인민군 최초의 기갑부대인 제115전차연대가 창설되었다. 1948년 12월, 조선인민군은 군정기를 마치고 철수하는 소련군으로부터 T-34 전차[17] 60대, 자주포 30대, 모터사이클 60대, 자동차 40대 등을 인수했다. 독소전쟁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조선인 병력 5,000여 명을 제115전차연대에 배속시켰고, 같은 해 5월 16일에 제105땅크여단으로 개편하였다.
1948년 10월, 105기갑대대로 창설되었으며 한 달 뒤 김일성으로부터 부대기를 수여받았다.[1] 1949년 5월에는 연대 규모로 증강되었다.
당초 소련은 북한에 500대의 전차를 지원하여 2개 전차 사단을 창설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육군의 대전차 장비 부족과 한국의 지형적 특성(도로, 교량 등)을 고려하여 지원 규모를 242대로 줄이고, 1개 여단 창설로 계획을 변경했다.
1949년 5월, 3개 전차연대(제107, 109, 203)와 제206기계화연대, 자주포대대, 제303기동정찰대, 제208교도연대 등으로 구성된 제105전차여단이 창설되었다. 제105전차여단은 총원 8,800명, T-34 전차 150대, SU-76 자주포 90대를 보유했다. 여단장 류경수, 문화 부여단장 안동수, 기술 부여단장 박일음, 참모장 천의완이 취임했다.
1950년 6월까지 105기갑연대는 병력 6,000명과 T-34 전차 120대를 보유한 105기갑여단으로 발전했다. 전차, 무기, 차량 등 장비는 소련제였다.[2]
1949년 10월경 제105전차여단은 다음과 같이 분산 배치되어 각종 훈련을 실시했다.
2. 2. 한국 전쟁
한국 전쟁 발발 전, 류경수 여단장이 지휘하는 제105전차여단은 예하 연대들이 조선인민군 제1군단 소속 제1, 3, 4, 제6사단에 배속되어 진격하였다. 그중 제3, 4사단에 배속된 제107, 109전차연대는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하고 남한 제7사단을 격파하였다. 1950년 6월 28일, 제105기갑여단은 서울에 진입하였으며, 제107연대 1대대장 김영 소좌가 중앙청에 인공기를 게양했다.[9][11]1950년 7월 5일, 김일성은 서울 점령의 공훈을 인정하여 부대에 '서울' 칭호를 수여하였다. 7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제54호에 따라 '근위대' 칭호를 받고 "근위 서울 제105땅크사단"으로 승격되었다.[5]
제107전차연대는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 특임대를 격파하였으나,[3] 이후 미국 공군의 참전과 대전 전투 이후 새롭게 투입된 슈퍼 바주카로 인해 피해가 점차 증가하였다. 낙동강 대공세에 참여한 후, 제105기갑사단은 부분적으로 재편되었고, 1950년 10월 말~11월 초 중국 인민지원군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이 사단은 몇 차례 전차를 이용해 화력 지원을 제공했지만, 이후 전투에서 미미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미군 제5공군은 전투 전선 뒤에서 대부분의 전차를 파괴했다.[6] 1950년 11월 7일, 유엔군 항공기는 박천군과 그 동쪽 지역에서 6대의 전차, 3대의 장갑차, 45대의 차량을 파괴했다고 보고되었다.[6]
2. 3. 한국 전쟁 이후
2001년 5월 23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0089호에 따라 한국전쟁 당시 지휘관이었던 류경수의 공적을 기려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땅크사단"으로 명명되었다.[18] 현재 황해북도 곡산군에 있는 제820훈련소 혹은 제820전차군단에 배속되어 있으며, 천마호와 폭풍호 전차를 장비하고 있다.[7] 김정일과 김정은으로부터 현지 지도를 자주 받고 있어 북한 주민들에게 인지도가 매우 높다.[10]3. 부대 구성
105기갑사단은 107, 109, 203 전차연대와 206 기계화 보병연대, 그리고 한국 전쟁 당시 추가된 83 기동연대로 구성되었다.[3] 각 전차연대는 3개 중형 전차대대로, 각 대대는 13대 전차를 보유한 3개 전차 중대로 구성되었다. 전차 1대당 승무원은 5명이었으며, 대대, 연대, 사단 지휘관은 개인 전차를 보유했다. 206 기계화 보병연대는 약 2,500명 병력과 SU-76 자주포를 보유했고, 자주포 승무원은 4명이었다.[4]
3. 1. 한국전쟁 이전
제105기갑사단의 기원은 1947년 5월 16일 평양직할시 사동 호랑이골에서 창설된 조선인민군 최초의 기갑부대인 제115전차연대이다. 1948년 12월 조선인민군은 군정기를 마치고 철수하는 소련군으로부터 T-34 전차[17] 60대, 자주포 30대, 모터사이클 60대, 자동차 40대 등을 인수했다. 독소전쟁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베테랑 조선인 병력 5,000여 명을 제115전차연대에 배속시켰고, 같은 해 5월 16일에 제105땅크여단으로 개편하였다.
1948년 10월 105기갑대대로 창설되었으며, 한 달 뒤 김일성으로부터 부대기를 수여받았다.[1] 1949년 5월에는 연대 규모로 증강되었다. 1950년 6월까지 병력 6,000명과 T-34 전차 120대를 보유한 105기갑여단으로 발전했다. 전차, 무기, 차량 등 장비는 소련제였다.[2]
여단은 107, 109, 203 전차연대와 206 기계화 보병연대로 구성되었다. 각 전차연대는 3개의 중형 전차대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각 대대는 13대의 전차를 보유했다. 각 전차대대는 3개의 전차 중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중대당 4대의 전차가 배치되었다. 전차 승무원은 5명으로 구성되었다. 대대, 연대, 사단 지휘관은 각각 개인 전차를 보유했다. 기계화 보병연대는 약 2,5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4] SU-76 자주포가 장비되었고 전차 승무원은 4명이었다.
3. 2. 한국전쟁 당시
6월 25일 새벽, 류경수 여단장이 지휘한 제105전차여단은 예하 연대를 조선인민군 제1군단 소속 제1, 3, 4, 제6사단에 배속시켜 진격하였다. 이때 제105전차여단은 독립여단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제3, 4사단에 배속된 제107, 109전차연대는 미아리 방어선을 뚫고 남한 제7사단을 격파하였다. 3일 뒤인 6월 28일 새벽, 한강을 건너 서울시로 진입하였고, 제107연대 1대대장 김영 소좌가 서울 중앙청에 인공기를 게양했다.[5]7월 5일, 서울 점령 공훈을 평가받은 제105전차여단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수상으로부터 '서울' 명예칭호를 받았다. 7월 27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제54호에 따라 군사 명예부대 칭호인 '근위대' 칭호를 받고 "근위 서울제105땅크사단"으로 승격되었다.
T-34 전차로 무장한 제107전차연대는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 특임대를 격파했다.[3] 이후 제107전차연대를 포함한 사단은 부산 교두보 전투에 참전했다.[3] 낙동강 대공세 이후 제105기갑사단은 부분적으로 재편되어 1950년 10월 말과 11월 초에 중국 인민지원군 지원을 위해 투입되었다. 몇 차례 전차를 이용한 화력 지원을 제공했지만, 이후 전투에서 역할은 미미했으며, 미군 제5공군이 전투 전선 뒤에서 대부분의 전차를 파괴했다. 11월 7일, 유엔군 항공기는 박천군과 그 동쪽 지역에서 전차 6대, 장갑차 3대, 차량 45대를 파괴했다고 보고했다.[6]
4. 주요 전투 및 사건
한국 전쟁 발발 초기, 류경수 소장의 지휘 아래 제105기갑여단은 1950년 6월 28일 서울에 도달했다.[5] 이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수상으로 부터 서울 점령에 대한 공훈으로 '서울' 칭호를 수여 받았으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제 54호에 의해 '근위대' 칭호를 수여 받고 "근위 서울 제 105 땅크사단"으로 승격 되었다. 이 부대는 서울에서 대전으로의 진격 작전에 참여했으며, 1950년 8월부터 9월 사이에 있었던 부산 교두보 전투에도 참전했다.[3] T-34 전차로 무장한 제107전차연대는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 특임대를 격파했고, 이후 연대는 나머지 사단과 함께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싸웠다.[3] 낙동강 대공세에 참여한 후, 제105기갑사단은 부분적으로 재편되었고, 1950년 10월 말과 11월 첫째 주에 중국 인민지원군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 미아리 전투
- 동두천 전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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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첫 단독 공식활동은 탱크부대 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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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김정일, 새해 들어 첫 군부대 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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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근위서울 류경수 제105탱크사단 방문…새해 첫 공개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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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76밀리 주포를 탑재한 T-34-76형이 아닌 85밀리 주포를 탑재한 T-34-85형.
[18]
문서
조선중앙통신《정치상식 조선인민군 근위 서울류경수제105땅크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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